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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창고

나는 호들갑스러운 사람이었다.

by ◼◼ 2022. 6. 20.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조명하곤 한다. 가끔은 타인의 시선을 마치 자신의 시선인냥, 덧씌워진 시선으로 쳐다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제자리를 찾아가게된다. 단지, 그 종착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른체 삶을 살아갈 뿐이다.

 

"사실 나는 호들갑스러운 사람이 아니다."

 

타인 속에 존재하던 나는 그렇게 호들갑스럽지도, 경망스럽지도 않았다. 언제나 차분하게 감정보다 이성을 앞세운, 조금은 재수없는 사람으로 존재했다. 여러 사람의 분쟁을 조정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자신의 길을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던 모습은 어찌보면 교과서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넌 왜그렇냐, 좀 더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노력해야지"

 

이런 말을 듣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살다보면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한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든이에게는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벗어나는 문제들을 만나기 마련이다.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문제라 부르는 것이겠지. 그런 문제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당황할 수 밖에 없다.

 

그야 그럴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준비를 해도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 자신을 덮치기 때문이다. 그러니 문제라 부르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침착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두 종류의 사람뿐일 것이다.

 

하나는 이미 그 경험을 해봤고, 충분히 생각을 해봤던 사람. 나머지 하나는 당사자의 성향, 다시 말해 그 사람이 문제를 봐라보는 시선과 태도에서 차이가 나타나는 사람일 것이다. 전자는 당연하지만 후자는 조금 모호하게 표현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조금 더 보태자면 후자는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일 수 있다.

 

문제 상황이 나아지길 간절히 바란다면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평소 안내던 화를 내고, 말이 많아지고, 무의미한 해동들이 늘어나는 것. 그런 모습이 상황에 몰입한 경험없는 인간의 모습일 수 있다.

 

제 3자가 본다면 '왜 저러지'라는 생각이 들 수 있는 모습, 그 모습을 조용히 관망할 수 있는 3자는 마치 자신이 대단한 것 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나는 정말 호들갑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상황에 몰입한 모습을 '호들갑스럽다'는 것으로 나타내려 한다. 물론, 사전적 의미와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몰입한 사람은 체면, 타인에 대한 배려, 이성적 사고등이 무뎌질 수 있다. 단지, 바라는 원하는 것에 다가갈 수 있는 많은 정보를 얻기위해 노력하려는 모습. 그 모습이 마치 호들갑스럽게 상황에 대면하고 있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차분하게 계획을 짜고, 계획을 수행하려 노력하고, 또 다시 그 상황을 분석하는 모습은 전문가의 숙련된 모습처럼 보이리라 생각했다. 언제나 차분히 상황에 대한 분석을 통해 최선의 결과를 얻는 것. 그것이 멋진 모습, 되고 싶은 모습이기도 했다. 그렇게 일부 타인은 나를 평가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습은 그 일에 진정 몰입한 것이 아니었다.

 

뒤를 돌아보니 돌아갈 곳이 있었고, 옆을 보니 피해갈 곳이 있었다. 또, 손만 뻗으면 손이 닫기도 전에 도움을 전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상황이든 도움을 받고 분석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당황할 필요가 없다.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조금 멈칫할 수는 있다.

 

우리가 진정 몰입할 수 있는 상황은 어떤 것이 있을까. 몇가지를 생각해보면 이럴 것이다. 건강 문제, 경제 문제, 사람관계 문제. 크게 이 3가지로 나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중에서도 건강 문제는 오롯이 자신의 몫이 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자. 건강은 자신이 늘 사용하던 신체에 대해 제한이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감기에 걸리면 호흡에 제한이 걸리 수 있다. 팔을 다치면 팔을 사용하는 활동, 환경에서 제한이 걸릴 수 있다. 제한은 우리에게 많은 불편함과 불안감을 안겨주는 것이다. 

 

타인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건강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시간과 비용의 측면일 것이다.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치료를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금액이 필요한 법이다. 또한, 자신의 업무를 누군가가 대신해줘야하는 상황이 발생된다. 이 부분에서는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의사를 대면하는 것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앞으로 어떻게 건강을 지켜갈 것인지에 대한 부분도 자신의 몫이다. 이 부분은 타인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정보를 얻고,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 된다.

 

나는 심리학을 좋아하는 선생님을 꿈꿨다. 아이들에게 어려운 것을 쉽게 풀어주고, 집중력을 높이게 이끌고, 도와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 어려운 부분에 대해 적절하게 상담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감정보다는 이론을 앞세워 차분하고 침착할 필요가 있다. 감정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 아닌 감정적 공감의 형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상태를 뜻한다.

 

이렇게 차분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나는 사실 호들갑스러운 사람이었다."

 

몸이 아프면 많은 생각을 하게된다. '이 병은 무슨병일까.', '이 증세는 어떤 질환과 연결될 수 있나.', '이렇게 아프면 나중에는 어떻게 하지.'등 다양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기 시작한다. 끝이 없는 소용돌이 같은 느낌이다.

 

아픈 몸에 대해 상담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의사선생님이다. 침착하게 환자의 증상을 말하고, 의사의 이야기를 듣는다. 해결방법을 의사가 궁리하면 환자는 따르게 된다. 가장 일반적인 순서이다. 이 순서는 누구나 알 수 있다.

 

하지만, 다양한 통증에 대한 불안과 걱정은 차분한 마음을 침식시킨다. 차분히 있기가 힘이 든다. 순간순간 몰입하게되고, 조급하게 접근하게 된다. 만약, 경험이 있다면 보다 침착할 수 있으리라. 그 경험이 없기에 평소의 침착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간절하고 호들갑스러운 모습이 등장하게 된다.

 

예전 내가 나를 조명하던 그 당시 그 녀석이 '왜 저러지'라며 비웃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하지만, 짧은 면담시간에 많은 정보를 얻고자하는 나의 간절함은 순가의 몰입도를 높이고, 두서없이 많은 고민을 털어놓게된다. 상당히 조급한 나와는 다르게 의사는 차분하다. 하나씩 증상에 대해 접근하고, 가장 큰 문제에 핵심을 둔다. 조금씩 상황정리가 되어가는 모습이다.

 

이제 나는 새롭게 나의 모습을 조명한다. 지금까지 옹졸했던 나에 대해 반성하고, 아주 약간 생각의 폭을 넓히게 되었다. 호들갑스럽다를 인정하고 나면, 타인이 왜 그렇게 호들갑스러운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저 '조급하고, 간절하구나'라는 것으로 말이다.

 

우리는 타인의 모든 것을 이해하진 못한다. 그저 그런갑다하고 지나갈 뿐이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는 세기의 거짓말쟁이가 아닐까. '그저 그런갑다'로 넘어 갈 수 있다는 것으로도 큰 무엇인가를 얻은 기분이 든다. 앞으로도 나는 호들갑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경험이 쌓여 상황에 무뎌진다면 점차 침착함을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호들갑스러운 나의 모습이 싫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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